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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축일

[스크랩] 2월 18일 성인들

by 보리수나무 2017.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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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2.18)

파레고리오(2.18)

신분 : 순교자

연대 : 260년경

 

 성 레오와 성 파레고리우스(Paregorius)는 가까운 친구 사이로 성 파레고리우스가 리키아(Lycia)의 파타라(Patara)에서 순교할 때 성 레오는 서글픈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리키아의 관리는 모든 주민들로 하여금 이교 신전에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칙령을 내렸는데, 성 레오는 친구 순교자의 무덤을 다녀오면서 이방인들의 신전을 지나쳐 집으로 왔으나, 꿈속에서 하느님이 그를 부르시어 친구와 같은 고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다시 친구의 무덤을 찾은 뒤 용감하게 거리로 나가서 이교신상 앞에 켜놓은 촛불들을 내동댕이쳤다. 그는 신성 모독죄로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후에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루치오(2.18)

루툴로(2.18)

막시모(2.18)

세쿤디노(2.18)

실바노(2.18)

클라시코(2.18)

프룩툴로(2.18)

신분 : 순교자

연대 : 연대미상

지역 : 아프리카

 

성 루키우스(또는 루치오), 성 실바누스(Silvanus), 성 루툴루스(Rutulus), 성 클라시쿠스(Classicus), 성 세쿤디누스(Secundinus), 성 프룩툴루스(Fructulus)와 성 막시무스(Maximus)는 아프리카 출신 순교자들이다. 이들의 이름은 믿을만한 사본의 권위하에 바로니우스(Baronius)에 의해 로마 순교록에 삽입되었다.

 

시메온(2.18)

 

신분 : 주교

연대 : 107년경

지역 : 예루살렘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성 시메온은 클레오파(Cleophas)의 아들이며 성 요셉(Joseph)의 형제이다(마태 13,55; 마르 6,3). 그러므로 예수님과는 사촌 형제간이다. 그는 성 야고보(Jacobus, 5월 3일) 사도가 순교한 뒤 예루살렘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성 시메온은 66년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파괴를 초자연적으로 경고한 바 있고, 그 도시의 신자들을 인근 도시인 펠라(Pella)로 데리고 가서 예루살렘이 잠잠해질 때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시아누스 황제의 박해는 용케 모면하였으나 트라야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집정관 아티쿠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한 명인 열성당원 시몬과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마태 10,4; 마르 3,18; 루가 6,15; 사도 1,13).

 

안질베르토(2.18)

신분 : 수도원장, 시인

연대 : 814년

지역 : 첸둘라

 

성 안길베르투스(또는 안질베르토)의 별명은 '호머'(Homer)인데, 그의 라틴 시가 매우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샤를대제(Charlemagne)의 궁중에서 자랐고, 알퀴누스(Alcuinus, 5월 19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 안길베르투스는 샤를대제의 딸 베르타(Bertha)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은 정치적인 의미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그 당시 덴마크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기를 늘 기도했는데, 폭풍우가 덴마크 군인들을 몰아내자 수도 생활을 꿈꾸고 이를 실행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내인 베르타는 수녀원에 들어갔고, 자신은 첸툴라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그곳의 원장이 되었으며 도서관을 설립하였다. 또한 그는 수도원에서 성가 부르는 것을 도입하여 그의 수하에 있던 300명의 수도자들이 늘 애용토록 하였다. 그는 샤를대제의 절친한 친구로 신임을 받고 있었으므로 궁중 사제, 고문관, 외교관의 직책도 역임하였다. 그 당시 그는 황제에게 진언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알렉산데르(2.18)

쿠시아(2.18)

클라우디오(2.18)

프레페디냐(2.18)

신분 : 순교자

연대 : 295년

 

 성녀 프레페디냐(Praepedigna)는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의 아내이며, 성 알렉산데르와 성 쿠티아(Cutias)는 그들의 자녀이다. 그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이탈리아의 오스티아(Ostia)에서 순교하였다.

 

요한 피부쉬(2.18) (복자)

신분 : 순교자

연대 : 1601년

 

 영국 잉글랜드(England) 요크셔(Yorkshire)의 티르스크(Thirsk) 출신인 요한 피부쉬(Joannes Pibush)는 1587년에 프랑스의 랭스(Reims)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4년 동안 영국 선교사로 활약하다가 1593년에 체포되어 런던의 게이트하우스에서 1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 한 차례 탈옥하였지만 곧 체포되어 또다시 감옥생활을 하였는데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단지 가톨릭 사제라는 죄목 하나만으로 순교하였다. 그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윌리엄 해링턴(2.18) (복자)

신분 : 순교자

연대 : 1566-1594년

 

 윌리엄 해링턴은 영국 요크셔(Yorkshire) 노스 라이딩(North Riding)의 성 요한 산(Mount Saint John)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 때에 손님으로 온 성 에드문두스 캠피언(Edmundus Campion, 12월 1일)을 만났고, 그의 매력에 이끌려 프랑스 랭스(Reims)로 가서 사제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예수회에 입회할 기회가 있었지만 건강 때문에 포기하였다. 그는 1592년에 사제가 된 후 영국 선교사로 귀향했으나 런던(London)에서 체포되었다. 9개월 동안이나 감옥생활을 하다가 그는 타이번(Tyburn)의 뉴게이트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27세였다. 그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그는 빌리암 해링턴으로도 불린다.

 

콜만노(2.18)

신분 : 주교

연대 : 605-676년경

지역 : 린디스파른

 

 아일랜드 북서부 코노트(Connaught) 태생인 성 콜만누스(Colmannus, 또는 콜만노)는 성 콜룸바(Columba, 6월 9일)의 지도아래 이오나(Iona)에서 수도자가 되었고, 성 피난(Finan, 2월 17일)을 계승하여 린디스파른의 세 번째 주교로 임명되었다. 663년에 개최된 휘트비 시노드(Synod of Whitby)에서 그는 성 발프리두스(Walfridus, 10월 12일)와 성 아길베르투스(Agilbertus, 10월 11일)를 반대하여 켈트(Celtic) 교회 전례의 주요 옹호자로 활동하였다.

국왕 오스위(Oswy)가 성 발프리두스와 로마 전례를 주창할 때, 성 콜만누스는 자신의 주교직을 사임하고 아일랜드와 잉글랜드(England)의 수도자들과 함께 린디스파른을 떠나 코노트 해안의 이니스보핀(Inishbofin) 섬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그곳에서 켈트 전례를 계속하였다. 아일랜드계와 잉글랜드계 수도자들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여 어려움에 처하자 그는 마요(Mayo)에 또 다른 수도원을 세우고 두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큰 공헌을 하였다.

 

테오토니오(2.18)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1166년

지역 : 코임브라

 

 성 테오토니우스(또는 테오토니오)는 포르투갈 중부 코임브라의 주교인 크레스코니우스(Cresconius)의 조카로서 어릴 때부터 사제 수업을 받았다. 그는 사제가 된 뒤에는 주로 본당사목을 하였는데, 매우 엄격한 생활과 높은 성덕 때문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얼마 후 그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였고, 포르투갈의 황녀와 백작이 그를 주교로 영입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자신이 항상 이를 거절했다. 두 번째로 성지를 순례한 뒤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회가 코임브라에 세운 새 수도원에 입회하여 장상을 역임하였다. 그를 지극히 존경하던 국왕 알폰수스는 성 십자가 수도원에 많은 선물을 희사하였다. 그는 80세까지 30여 년 동안을 원장으로 봉사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167년 포르투갈의 주교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후에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 1740-1758년 재임)에 의해 승인되었다.

 

플라비아노(2.18)

신분 : 총대주교, 순교자

연대 : 449년

지역 :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플의 사제이며 경리 담당이던 성 플라비아누스(Flavianus, 또는 플리비아노)는 447년에 성 프로클루스(Proclus, 10월 24일)를 계승하여 총대주교로 승품되었다. 그러나 그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3세의 대관식에 특별 선물을 보내라는 크리사피우스(Chrysaphius) 재상의 제안을 거부해서 큰 공경에 빠진 적이 있었다. 또 448년에 그가 소집한 회의에서는 크리사피우스의 대부이던 에우티케스(Eutyches) 원장의 가르침이 이단이라 하여 단죄하고 사제직을 박탈하여 더 큰 파문을 일으켰다. 에우티케스는 이에 불복하여 로마(Rome)에 상소했으나 교황 대 레오 1세(Leo I, 11월 10일)는 정통교리를 고수하고자 노력한 성 플라비아누스의 용기를 격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레오의 책"(Tome of Leo)으로 전해오는 유명한 문서이다.

황제 측은 이에 분개하여 에페수스(Ephesus) 공회의를 소집하였지만 교황은 이를 '불법 시노드'로 단정하였다. 황제의 측근들은 성 플라비아누스를 몰아내고 리디아(Lydia)의 히페페(Hypepe) 감옥에 투옥시켰다. 그는 그 후 얼마 뒤에 운명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순교자로도 불린다. 왜냐하면 황제 측근 군사들에 의한 심한 고문과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451년에 개최된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에서 성 플라비아누스는 성인이자 순교자로 선포되었다.

 

헬라디오(2.18)

신분 : 대주교

연대 : 632년

지역 : 톨레도

 

에스파냐 톨레도 태생의 성 헬라디우스(또는 헬라디오)는 젊었을 때에 서고트족(Visigoths)의 왕궁에서 일한 매우 유식한 사람으로 외교관과 고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관리의 신분으로 589년의 톨레도 회의에 참석하였다. 평소 가끔씩 타구스(Tagus) 강변에 있는 아갈리아(Agallia) 수도원을 찾았던 그는 이때 수도생활에 대한 열망을 버릴 수 없어서 세속적인 모든 재산과 지위를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605년 그는 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그 얼마 후에 톨레도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비길 데 없을 만큼의 사랑을 베풀었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출처 : 별을 헤는사람들
글쓴이 : 바오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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