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종교를 세계종교화 시켜”
세차례 전도여행하며‘이방인들의 사도’ 자청
이탈리아 로마 남문 밖 교외에 위치한 「세 분수의 성당」(Chiesa di Tre Fontane)은 사도 바오로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정열적 인생의 막을 내리고 참수 당했던 장소다.
바오로의 목을 올려놓고 칼로 쳤던 돌기둥이 보관돼 있고 사형 집행자가 목을 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을 볼 수 있는 이곳은 바오로의 목을 벤 순간 그의 목이 세 번 튀었고 튀었던 자리마다 샘이 솟아나고 있다는 전설에서 세 분수, 즉「뜨레 폰타네」라고 불려지고 있다.
좁은 팔레스티나를 벗어나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를 거쳐 로마 제국에 까지 3차에 걸친 전도여행으로 하느님을 전하면서 지역적 민족적 종교에서 그리스도교를 인류 전체를 향한 세계 종교로 탈바꿈 시킨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
독실한 유다교 가정에서 태어나 철저한 바리사이파로 처신하면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자였던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가담하는 한편 시리아 지방의 다마스커스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원정을 갈만큼 교회 박해에 앞장섰던 그는 다마스커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중 부활한 예수를 만나 회심의 마음을 갖게되고 그 후 전 생애를 「예수를 주님으로 선포」하는데 바쳤다.
그리스도교 초창기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인물로 한편의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삶을 보였던 그는 생애 뿐만 아니라 그 마지막에도 신앙적 여운을 남겨준다고 하겠다.
언제 탄생했는지, 또한 가족이나 부모에 관한 기록이 나와있지 않아 바오로의 출생 연대를 정확히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학계에서는 기원후 5~1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막연하게 추측하고 있다.
출생지는 당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고 스토아 학파의 유명 철학자들이 활약했던 다르소(Tarsus). 당시 다르소에는 많은 유다인들이 이민을 와서 정착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배경속에서 바오로는 자연스럽게 그리스어와 셈족어를 비롯한 그 문화들을 익힐 수 있는 배경을 갖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오로는 유다교 그리스문화 로마정치의 상황안에서 영향을 받았고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여겼다. 율법을 비판한 예수라는 인물을 그는 용납할 수 없었고 부활의 증언들 역시 허구에 불과했다.교회 박해에 앞장섰던 이유는 그같은 영향들에서 비롯된다.
부활한 예수를 만난후 회심한 바오로는 율법과 성전에 대해 비판적 신앙노선을 보이게 된다. 또한 유다 민족을 넘어서 이방인들에게 활발히 전도하면서 스스로 이방인들의 사도로 자처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바오로가 자신이 부활한 주님을 만나 직접 예수로부터 복음을 선포할 선교사명을 받았으므로 스스로를 사도라고 주장했으며 또 이방 선교를 위해 자신이 특별히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밝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초기 교회 상황에서 유다교 지역 이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람이다. 이들은 1년동안 함께 지중해 동부 여러 지역을 전도했다. 사도 바오로의 활동은 사도행전과 함께 손수 저술한 편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서간들은 그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는 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약성서 27권 문헌중 13권에 해당되는 서간들은 신약성서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문헌들이라는 점과 함께 초기 교회 그리스도교 교리가 형성되는데 있어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눈여겨 볼만 하다.
학자들은 무엇보다 신심사적으로 볼 때 그의 삶과 가르침은 당시 교회 안에 매우 큰 파장을 일으켰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회개한 과정은 그러한 가장 비근한 사례로 떠오른다. 또한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기본적 성서적 배경이 사도 바오로의 서간이었다는 점에서 교회일치적 측면의 중요성도 인정되고 있다.
『내게는 산다는 것 자체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필립 1, 21)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로마 5, 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 38~39)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보듯 바오로는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심사숙고한 사람도 드물다』는 이야기가 따를 만큼 「사랑」의 관점에서 예수 사건을 풀이하면서 하느님은 사랑의 원천임을 알린 장본인이다. 또 그에 앞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탕으로한 삶을 철저히 산 신앙인으로 알려진다.
이같이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전 인생의 바탕으로 삼을 수 있었고 사람들에게 이를 고백하며 확고한 「신앙」을 보여줄 수 있었던 동인(動因)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복음을 수동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받아들인 자세에서 풀이 해볼 수 있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하는 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는 것.
한 성서학자는 『바오로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바오로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과 관련된 중요한 소식이었고 바로 그런 면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도로 부르시어 이방인들을 포함, 만백성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이해를 할만큼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다』고 들려준다.
아직「선교지역이라는 한국 사회안에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한 전 생애를 선교 정신으로 불태웠던 그의 삶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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