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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축일

[스크랩] 4월 3일 성인들

by 보리수나무 2017.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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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간둘포(Gandulf)
축일:4월 3일
성인구분:복자
신분:수사
활동지역:비나스코(Binasco)
활동연도:+1260년
같은이름:

간둘푸스, 간둘프


 간둘푸스(Gandulphus, 또는 간둘포)는 이탈리아 밀라노(Milano) 교외 비나스코에서 태어나서 성 프란치스코 생존시에 입회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의 일생은 극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얼마 동안은 은둔생활을 하려는 헛된 꿈을 꾸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파스칼 수사와 더불어 팔레즈모를 떠나 황야로 갔으나,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을 저버릴 수 없었다. 폴리치에서 행한 그의 설교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예언한 날인 성 토요일에 운명하였는데, 한 무리의 새들이 지붕 위에 날아와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고 한다.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는 1804년 8월 4일 이탈리아 북부 프리울리(Friuli) 지역의 우디네에서 신심 깊고 자애심 많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12살 때 그는 우디네 교구의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직을 준비해 1827년 사제품을 받았는데, 첫 미사를 봉헌할 때 그의 형제인 카롤루스(Carolus)와 세례자 요한(Joannes) 신부가 옆에서 그를 도왔다.

   1800년대 프리울리는 기근과 전쟁 그리고 페스트로 말미암아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형제인 카롤루스가 운영하던 고아원의 운영을 도와 우디네와 그 주변 지역의 가난하고 버려진 소녀들을 모아 교육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는 그의 모든 재물과 힘과 애정을 그들에게 쏟아 부었다. 소녀들을 위해 더 큰 시설이 필요해지면 우디네와 인근 지역의 거리를 돌며 구걸하듯이 사람들의 지원을 호소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그가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 속에서 소녀들의 교육에 헌신하는 모습은 인근 지역에서 가난하고 버려진 이들을 위해 활동하던 몇몇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여성들은 재봉과 자수에 숙달된 기술을 갖고 있었고, 읽고 쓰고 계산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연령대와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갖고 있었지만 하느님의 손길에 이끌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안에 살며 하느님을 섬기고자 했다.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의 영적 지도를 받으며 봉사하던 9명의 여성들은 마침내 1837년 2월 1일 모든 소유에서 벗어나 가난 안에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계속해서 다른 이들이 동참했는데, 그들은 부자, 가난한 자, 교육 받은 자, 문맹자, 귀족 출신, 비천한 출신들이 모두 섞여 있었다.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는 이들 모두에게 열려 있었고, 설립자는 그들이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소녀들을 사랑으로 대하도록 격려하며 이끌어 주었다.

   그러면서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가난에 대한 이상과 보편적 형제애에 매혹되어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할 필요성에 대해 고심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를 기쁨과 자유의 시인, 기도의 성인, 겸손과 사목적 열정의 소유자였던 성 필리푸스 네리(Philippus Neri, 5월 26일)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이끌었다. 결국 그는 1846년 42세의 나이에 오라토리오회(Oratoriani)에 가입하여 성 필리푸스 네리의 영적 아들이 되었고, 그로부터 온순함과 다정함을 배웠다. 이는 그가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 설립자이자 사제로서 더 합당하게 처신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수녀들의 자기 개발과 성덕의 성장을 위해 깊은 관심과 존경을 갖고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수녀들의 성소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그들이 더욱 강인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때때로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기도 했다. 또한 허영과 공명심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고 위선과 천박한 태도를 보일 때는 엄하게 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아버지다운 자애로써 수녀들의 약점을 바라보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지원하고 위로하였다.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베들레헴의 육화에서 드러난 겸손과 가난, 나자렛의 노동자로서의 단순함, 십자가 위에서 바친 온전한 희생, 성체성사의 침묵 안에서 수녀회를 이끌 영성의 기초를 만들어갔다.

   그는 일생 동안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추구했다. 그는 죽기 전에 열두 개의 수녀원을 세울 것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열두 개의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수녀들은 겸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도움이 필요한 젊은 소녀들과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고 늙어 홀로 남겨진 이들을 위해 봉사했다. 또한 그는 수녀들이 선의를 지닌 사람들과의 폭넓은 공동 협력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지원하도록 했다. 교회의 모든 활동에 적극 협력했던 그는 우디네 신학교의 젊은이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보다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19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들이 통일의 역사를 걷게 되었다. 정치적 · 군사적 측면에서 이러한 통일은 유럽의 북부와 남부, 동부와 서부의 국경이자 교차로인 프리울리 지역 전체에 고통스런 시련을 가져왔다. 통일의 결과물 중 하나는 불행하게도 반성직주의(反聖職主義)였다. 이러한 풍토는 고아원과 오라토리회 사제들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자신들의 활동과 고아들의 선익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시작했다. 고아들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우디네의 오라토리회의 파괴를 막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오랜 세월의 경험을 통해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영적인 지혜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특별한 직관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1883년 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자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 병마와 싸웠다.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알고 그는 모든 수녀들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썼다. “나의 죽음 이후 수녀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새로운 삶이 주어질 것이다. 애덕! 애덕! 이것은 수녀회 가족의 정신이다. 영혼들을 구하고 애덕으로 그들을 구하여라.”

   1884년 4월 3일 목요일 밤,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러 떠났다. 우디네 전체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서둘러 모였고, 하느님께서 그를 보호해 주시기를 간청했다. 가난하고 어려움 중에 있는 젊은이들의 선익을 위한 그의 노력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과의 일치, 동정과 사랑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지금도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걷는 이들의 발걸음에 동행하고 있다. 그는 1981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1년 6월 10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알로이시우스 스크로소피(Aloysius Scrosoppi)로도 불린다.



참고자료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송영웅 옮김, 오늘 성인(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성인들) -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14년, 147-151쪽.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는 1804년 8월 4일 이탈리아 북부 프리울리(Friuli) 지역의 우디네에서 신심 깊고 자애심 많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12살 때 그는 우디네 교구의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직을 준비해 1827년 사제품을 받았는데, 첫 미사를 봉헌할 때 그의 형제인 카롤루스(Carolus)와 세례자 요한(Joannes) 신부가 옆에서 그를 도왔다.

   1800년대 프리울리는 기근과 전쟁 그리고 페스트로 말미암아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형제인 카롤루스가 운영하던 고아원의 운영을 도와 우디네와 그 주변 지역의 가난하고 버려진 소녀들을 모아 교육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는 그의 모든 재물과 힘과 애정을 그들에게 쏟아 부었다. 소녀들을 위해 더 큰 시설이 필요해지면 우디네와 인근 지역의 거리를 돌며 구걸하듯이 사람들의 지원을 호소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그가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 속에서 소녀들의 교육에 헌신하는 모습은 인근 지역에서 가난하고 버려진 이들을 위해 활동하던 몇몇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여성들은 재봉과 자수에 숙달된 기술을 갖고 있었고, 읽고 쓰고 계산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연령대와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갖고 있었지만 하느님의 손길에 이끌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안에 살며 하느님을 섬기고자 했다.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의 영적 지도를 받으며 봉사하던 9명의 여성들은 마침내 1837년 2월 1일 모든 소유에서 벗어나 가난 안에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계속해서 다른 이들이 동참했는데, 그들은 부자, 가난한 자, 교육 받은 자, 문맹자, 귀족 출신, 비천한 출신들이 모두 섞여 있었다.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는 이들 모두에게 열려 있었고, 설립자는 그들이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소녀들을 사랑으로 대하도록 격려하며 이끌어 주었다.

   그러면서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가난에 대한 이상과 보편적 형제애에 매혹되어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할 필요성에 대해 고심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를 기쁨과 자유의 시인, 기도의 성인, 겸손과 사목적 열정의 소유자였던 성 필리푸스 네리(Philippus Neri, 5월 26일)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이끌었다. 결국 그는 1846년 42세의 나이에 오라토리오회(Oratoriani)에 가입하여 성 필리푸스 네리의 영적 아들이 되었고, 그로부터 온순함과 다정함을 배웠다. 이는 그가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 설립자이자 사제로서 더 합당하게 처신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수녀들의 자기 개발과 성덕의 성장을 위해 깊은 관심과 존경을 갖고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수녀들의 성소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그들이 더욱 강인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때때로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기도 했다. 또한 허영과 공명심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고 위선과 천박한 태도를 보일 때는 엄하게 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아버지다운 자애로써 수녀들의 약점을 바라보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지원하고 위로하였다.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베들레헴의 육화에서 드러난 겸손과 가난, 나자렛의 노동자로서의 단순함, 십자가 위에서 바친 온전한 희생, 성체성사의 침묵 안에서 수녀회를 이끌 영성의 기초를 만들어갔다.

   그는 일생 동안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추구했다. 그는 죽기 전에 열두 개의 수녀원을 세울 것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열두 개의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수녀들은 겸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도움이 필요한 젊은 소녀들과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고 늙어 홀로 남겨진 이들을 위해 봉사했다. 또한 그는 수녀들이 선의를 지닌 사람들과의 폭넓은 공동 협력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지원하도록 했다. 교회의 모든 활동에 적극 협력했던 그는 우디네 신학교의 젊은이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보다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19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들이 통일의 역사를 걷게 되었다. 정치적 · 군사적 측면에서 이러한 통일은 유럽의 북부와 남부, 동부와 서부의 국경이자 교차로인 프리울리 지역 전체에 고통스런 시련을 가져왔다. 통일의 결과물 중 하나는 불행하게도 반성직주의(反聖職主義)였다. 이러한 풍토는 고아원과 오라토리회 사제들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자신들의 활동과 고아들의 선익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시작했다. 고아들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우디네의 오라토리회의 파괴를 막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오랜 세월의 경험을 통해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영적인 지혜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특별한 직관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1883년 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자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 병마와 싸웠다.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알고 그는 모든 수녀들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썼다. “나의 죽음 이후 수녀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새로운 삶이 주어질 것이다. 애덕! 애덕! 이것은 수녀회 가족의 정신이다. 영혼들을 구하고 애덕으로 그들을 구하여라.”

   1884년 4월 3일 목요일 밤,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러 떠났다. 우디네 전체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서둘러 모였고, 하느님께서 그를 보호해 주시기를 간청했다. 가난하고 어려움 중에 있는 젊은이들의 선익을 위한 그의 노력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과의 일치, 동정과 사랑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지금도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걷는 이들의 발걸음에 동행하고 있다. 그는 1981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1년 6월 10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알로이시우스 스크로소피(Aloysius Scrosoppi)로도 불린다.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는 1804년 8월 4일 이탈리아 북부 프리울리(Friuli) 지역의 우디네에서 신심 깊고 자애심 많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12살 때 그는 우디네 교구의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직을 준비해 1827년 사제품을 받았는데, 첫 미사를 봉헌할 때 그의 형제인 카롤루스(Carolus)와 세례자 요한(Joannes) 신부가 옆에서 그를 도왔다.

   1800년대 프리울리는 기근과 전쟁 그리고 페스트로 말미암아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형제인 카롤루스가 운영하던 고아원의 운영을 도와 우디네와 그 주변 지역의 가난하고 버려진 소녀들을 모아 교육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는 그의 모든 재물과 힘과 애정을 그들에게 쏟아 부었다. 소녀들을 위해 더 큰 시설이 필요해지면 우디네와 인근 지역의 거리를 돌며 구걸하듯이 사람들의 지원을 호소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그가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 속에서 소녀들의 교육에 헌신하는 모습은 인근 지역에서 가난하고 버려진 이들을 위해 활동하던 몇몇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여성들은 재봉과 자수에 숙달된 기술을 갖고 있었고, 읽고 쓰고 계산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연령대와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갖고 있었지만 하느님의 손길에 이끌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안에 살며 하느님을 섬기고자 했다.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의 영적 지도를 받으며 봉사하던 9명의 여성들은 마침내 1837년 2월 1일 모든 소유에서 벗어나 가난 안에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계속해서 다른 이들이 동참했는데, 그들은 부자, 가난한 자, 교육 받은 자, 문맹자, 귀족 출신, 비천한 출신들이 모두 섞여 있었다.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는 이들 모두에게 열려 있었고, 설립자는 그들이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소녀들을 사랑으로 대하도록 격려하며 이끌어 주었다.

   그러면서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가난에 대한 이상과 보편적 형제애에 매혹되어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할 필요성에 대해 고심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를 기쁨과 자유의 시인, 기도의 성인, 겸손과 사목적 열정의 소유자였던 성 필리푸스 네리(Philippus Neri, 5월 26일)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이끌었다. 결국 그는 1846년 42세의 나이에 오라토리오회(Oratoriani)에 가입하여 성 필리푸스 네리의 영적 아들이 되었고, 그로부터 온순함과 다정함을 배웠다. 이는 그가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 설립자이자 사제로서 더 합당하게 처신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수녀들의 자기 개발과 성덕의 성장을 위해 깊은 관심과 존경을 갖고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수녀들의 성소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그들이 더욱 강인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때때로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기도 했다. 또한 허영과 공명심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고 위선과 천박한 태도를 보일 때는 엄하게 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아버지다운 자애로써 수녀들의 약점을 바라보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지원하고 위로하였다.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베들레헴의 육화에서 드러난 겸손과 가난, 나자렛의 노동자로서의 단순함, 십자가 위에서 바친 온전한 희생, 성체성사의 침묵 안에서 수녀회를 이끌 영성의 기초를 만들어갔다.

   그는 일생 동안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추구했다. 그는 죽기 전에 열두 개의 수녀원을 세울 것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열두 개의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수녀들은 겸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도움이 필요한 젊은 소녀들과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고 늙어 홀로 남겨진 이들을 위해 봉사했다. 또한 그는 수녀들이 선의를 지닌 사람들과의 폭넓은 공동 협력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지원하도록 했다. 교회의 모든 활동에 적극 협력했던 그는 우디네 신학교의 젊은이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보다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19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들이 통일의 역사를 걷게 되었다. 정치적 · 군사적 측면에서 이러한 통일은 유럽의 북부와 남부, 동부와 서부의 국경이자 교차로인 프리울리 지역 전체에 고통스런 시련을 가져왔다. 통일의 결과물 중 하나는 불행하게도 반성직주의(反聖職主義)였다. 이러한 풍토는 고아원과 오라토리회 사제들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자신들의 활동과 고아들의 선익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시작했다. 고아들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우디네의 오라토리회의 파괴를 막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오랜 세월의 경험을 통해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영적인 지혜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특별한 직관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1883년 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자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 병마와 싸웠다.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알고 그는 모든 수녀들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썼다. “나의 죽음 이후 수녀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새로운 삶이 주어질 것이다. 애덕! 애덕! 이것은 수녀회 가족의 정신이다. 영혼들을 구하고 애덕으로 그들을 구하여라.”

   1884년 4월 3일 목요일 밤,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러 떠났다. 우디네 전체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서둘러 모였고, 하느님께서 그를 보호해 주시기를 간청했다. 가난하고 어려움 중에 있는 젊은이들의 선익을 위한 그의 노력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과의 일치, 동정과 사랑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지금도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걷는 이들의 발걸음에 동행하고 있다. 그는 1981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1년 6월 10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알로이시우스 스크로소피(Aloysius Scrosoppi)로도 불린다.


 

 


아분디오(4.2)

신분 : 주교

연대 : 469년

지역 : 코모

 

그리스 사제인 성 아분디우스(또는 아분디오)는 이탈리아 북부 코모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저명한 신학자였기 때문이었다. 교황 성 대 레오 1세(Leo I)는 451년 칼케돈(Chalcedon)에서 공의회를 개최하기 위해 그를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게 사절로 보냈다. 그리고 칼케돈 공의회에서 성 아분디우스는 교황사절로서 공의회를 이끌며 교회의 역할과 관심을 분명히 하였다.

 

아피아노(4.2)

신분 : 순교자

연대 : 306년

지역 : 리키아

 

성 아피아누스(Apphianus, 또는 아피아노)는 소아시아 남서쪽 끝에 위치한 리키아(Lycia) 출신으로 페니키아(Phoenicia, 오늘날 시리아, 레바논 해안지대의 고대 지명)의 베리투스(Berytus, 현재의 베이루트)에서 학교를 다니던 중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 후 19세 때에 카이사레아(Caesarea)로 이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 지방 총독이 모든 주민들은 신전에 희생을 바치라는 포고령을 내려 거창한 예식이 시작되었는데, 그는 아무런 성의 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행동을 취하여 문제가 되었다. 감독관은 무조건 그를 발길로 찬 뒤 지하 감옥에 넣었다. 그리하여 심문이 시작되었을 때 아피아누스는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오.” 하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그들은 아피아누스의 발을 기름에 튀기는 형을 가한 뒤 신전 앞으로 끌고 갔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오직 한 천주이신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합니다.”그래서 그는 바다에 던져져서 순교하였다. 

이즈음 티레(Tyre) 출신인 성녀 테오도시아(Theodosia)는 카이사레아의 성녀라고 불리었는데, 그녀는 죽음을 앞둔 죄수들을 찾아가서 하느님을 잊지 말고 신앙을 고백하라고 타이르거나 그들을 위로하며 동분서주하였다. 이윽고 그녀 역시 그리스도인임이 발각되어 창으로 옆구리가 찔리고, 가슴을 도려내는 형벌을 받은 후 바다에 던져지는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요한 페인(4.2)

신분 : 순교자

연대 : 1582년

지역 : 영국

 

 영국 잉글랜드(England) 피터버러(Peterborough) 태생인 성 요한 페인(Joannes Payne)은 열렬한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자랐으나,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574년에 프랑스 두에(Douai)에 도착하였다. 그 후 서품되자마자 즉시 영국 선교 길에 올라 에셀스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매우 정열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는데, 1년도 채 못 되어서 그가 몰래 숨어 살던 집의 주인인 페트르(Petre) 부인과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첼름스퍼드(Chelmsford)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우르바노(4.2)

신분 : 주교

연대 : 390년

지역 : 랑그르

 

성 우르바누스(Urbanus, 또는 우르바노)는 374년 프랑스 북동부 랑그르의 제6대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부르고뉴(Bourgogne) 일부와 인근 지역에서 포도나무 재배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우르바누스는 포도송이를 들고 있거나 옆에 포도나무가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테오도시아(4.2)

신분 : 동정 순교자

연대 : 306년

지역 : 티레

 

 성 아피아누스(Apphianus)는 소아시아 남서쪽 끝에 위치한 리키아(Lycia) 출신으로 페니키아(Phoenicia, 오늘날 시리아, 레바논 해안지대의 고대 지명)의 베리투스(Berytus, 현재의 베이루트)에서 학교를 다니던 중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 후 19세 때에 카이사레아(Caesarea)로 이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 지방 총독이 모든 주민들은 신전에 희생을 바치라는 포고령을 내려 거창한 예식이 시작되었는데, 그는 아무런 성의 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행동을 취하여 문제가 되었다. 감독관은 무조건 그를 발길로 찬 뒤 지하 감옥에 넣었다. 그리하여 심문이 시작되었을 때 아피아누스는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오.” 하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그들은 아피아누스의 발을 기름에 튀기는 형을 가한 뒤 신전 앞으로 끌고 갔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나는 오직 한 천주이신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는 바다에 던져져서 순교하였다. 

이즈음 티레 출신인 성녀 테오도시아는 카이사레아의 성녀라고 불리었는데, 그녀는 죽음을 앞둔 죄수들을 찾아가서 하느님을 잊지 말고 신앙을 고백하라고 타이르거나 그들을 위로하며 동분서주하였다. 이윽고 그녀 역시 그리스도인임이 발각되어 창으로 옆구리가 찔리고, 가슴을 도려내는 형벌을 받은 후 바다에 던져지는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프란치스코(4.2)

 

신분 : 은수자, 설립자

연대 : 1416-1507년

지역 : 파올라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의 파올라에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산마르코(San Marco)에서 프란치스코 회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15세가 되었을 때 파올라 교외에서 은수자가 되었다. 그 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동료들이 불어나서 그들은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공동체가 ‘미니미 프라트레스회’(Minimi Fratres, least brothers)의 시작이었다. 그는 자신이 은수생활을 하던 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회개와 애덕 그리고 겸손을 특히 강조하는 회칙을 확정하였으며, 세 가지 서원 외에 단식과 음식의 절제 서원을 덧붙였다. 또한 그는 3회원과 수녀회를 위한 회칙을 만들었다. 

그의 생활이 거룩하고도 엄격하였던 만큼 그의 영적 영향 또한 커졌고 특히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의 명성은 곧 프랑스로 번졌다. 그가 지닌 예언의 은혜 역시 뛰어났고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수도회는 교황 식스투스 9세(Sixtus IX)로부터 승인을 받았는데, 이때 이 수도회의 이름은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의 은수자회였다. 


그의 명성이 죽어가는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귀에까지 전해져서 국왕이 그를 보기를 원하자 교황은 그가 프랑스로 가도록 명하였다. 왕은 프란치스코만이 자신을 치료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비록 치유되지는 못하였지만 큰 위로를 받고 만족했으며, 이 때문에 루이의 아들인 샤를 8세가 프란치스코의 친구가 되어 프랑스 내의 여러 곳에 미니미 프라트레스회 수도원을 지어주었다. 그는 프랑스의 플레시즈레투르(Plessis-les-Tours) 수도원에서 여생을 지내다가 사망하였다. 그는 1519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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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별을 헤는사람들
글쓴이 : 바오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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